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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와 강화 사이에는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차이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부상당한 선수가 손상된 근육을 유전자 치료법으로 복구하는 것이 괜찮다면, 유전학 기술로 건강한 근육을 강화해 과거보다 더 향상된 몸 상태로 경기에 출전하는 것은 어째서 잘못인가?
공정성을 근거로 유전적 강화에 반대하는 논리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유전적으로 남들보다 더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이들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선천적 불평등이 스포츠의 공정성을 훼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포츠에서건 인생에서건 성공이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얻어야 할 무언가라고 믿고 싶어 한다. 선천적 재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존경심은 실적주의에 대한 믿음을 난처하게 만든다. 또 칭찬과 보상이 노력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의문을 갖게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불편함에 직면하여 노력의 도덕적 중요성을 부풀리고 타고난 재능의 의미를 평가 절하한다.
문제는 부모가 자녀를 설계함으로써 자녀의 자율권을 빼앗는다는 점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를 설계하지 않아도 아이는 자신의 유전적 특성을 스스로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자녀를 설계하는 부모의 오만함, 그리고 생명 탄생의 신비로움을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욕구다. 그런 성향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 대해 폭군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성향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훼손하고 부모로 하여금 ‘선택하지 않은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길러질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공감과 겸손함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아이의 능력을 함양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강화에 대한 반대론을 다소 복잡한 국면에 빠트린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 최선의 것을 추구하고 아이의 행복과 성공을 돕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부모를 존경한다. 그렇다면 교육과 훈련을 통해 그런 도움을 제공하는 것과 유전적 강화 기술을 통해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생학의 교훈을 정리하는 일은 강화의 윤리와 씨름하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이다. 나치는 우생학에 오명을 씌웠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 때문에 우생학이 잘못된 것인가? 오로지 강제성을 띤다는 이유 때문에 우생학에 반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음 세대의 유전적 구성을 통제하기 위한 비강제적 방법들도 잘못된 것인가?
우생학과 유전공학의 문제점은 그것이 일방적인 승리를 대변한다는 점이다. 가령, 계획적인 의도가 선물에 대한 감사의 태도를 누르고, 지배하는 자세가 경외하는 자세를 누르고, 틀에 맞춰 만들어내는 것이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누르고 이기는 경우다.
과거에는 운명이 좌우하던 영역이 이제는 선택이 지배하는 영역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적 충동에는 전염성이 있다.
끔찍한 질병을 치료하고자 배아를 만들어 희생시키는 것이 비도덕적이라면, 불임치료 과정에서 여분의 배아를 만들어 폐기하는 것에는 어째서 반대하지 않는가? 또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불임클리닉에서 배아를 만들고 희생시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괜찮다면,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배아를 만들고 희생시키는 것이 괜찮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은 두 가지 모두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한 일이며, 파킨슨병이나 당뇨병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적어도 불임치료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