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를 읽었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꺾은 뒤, 지난 10년 동안 바둑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취재해 정리한 책이다.
알파고와 구글 딥마인드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다큐멘터리와 기사,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다뤄져 왔다. 하지만 정작 그 사건 이후 프로 기사들과 바둑계 전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변화가 얼마나 깊고 넓게 퍼졌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흥미로웠다. 승부 자체보다, 그 이후에 바둑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더 인상적이었다.
책에서 다뤄진 변화들 가운데 특히 흥미로웠던 것들만 정리해봤다.
AI가 바둑의 정답이 됐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인간이 끝까지 계산할 수 없는 게임이다. 그래서 프로기사들은 세력, 두터움, 기세, 대세관, “기분이 나쁜 모양”, “뒷맛이 안 좋다” 같은 추상적 언어로 형세를 읽고 설명해왔다. 어떤 기사들은 승패만이 아니라 돌의 균형과 아름다움까지 말했고, 바둑을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알파고는 그 세계를 한 번에 무너뜨렸다. 인간의 감각과 해석이 붙들고 있던 영역을 AI가 승률과 최적 수순으로 더 정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모호한 해석의 언어는 곧바로 권위를 잃었다. 수천 년 동안 쌓인 기보와 정석도 더 이상 최종 기준으로 존중받지 못하게 됐다. 그 어떤 기보도, 그 어떤 전술도 AI보다 더 깊은 바둑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자, AI는 참고 자료가 아니라 사실상의 정답이 됐다.
알파고 이전의 바둑계는 새로운 수를 제시하고, 그것을 두고 토론하고, 서로 다른 해석과 기풍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알파고 이후 그 질서는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기보와 정석, 인간의 해설과 감각은 최종 판정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무엇이 맞는 수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강한 기준은 AI가 됐다.
프로 기사들에게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알파고의 승리는 프로 기사들에게 단순한 패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둑은 그들에게 직업이기 전에, 평생을 걸고 쌓아온 감각과 질서, 그리고 자부심의 체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파고 이후 기사들이 남긴 반응도 평범한 패배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게 다 무너지는 느낌”,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노력은 어떤 가치가 있었을까” 같은 말들은, 실력의 열세보다 더 깊은 붕괴감을 보여준다.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결국 은퇴를 선언했고, 이런 말을 남겼다. “어린 시절, 바둑은 예술과 같은 것으로 배웠다. 바둑은 돌이 만드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무슨 작품이 되겠나. 내가 배웠던 예술 그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더 이상은 하기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파고 이후 무너진 것은 몇 가지 정석이 아니라, 프로 기사들이 평생 바둑에 걸어온 의미 자체였다.
처음에는 그 패배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려는 시선도 있었다. 알파고는 인간의 기보와 축적된 바둑 지식을 학습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계가 인간을 완전히 넘어선 사건이라기보다 인간의 축적이 다른 방식으로 증폭된 결과처럼 해석할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2017년 등장한 알파고 제로는 그 해석마저 무너뜨렸다. 알파고 제로는 인간 기사들의 기보를 학습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바둑의 규칙만 주어진 채, 스스로 수많은 자가 대국을 반복하며 강해진 모델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알파고 제로는 36시간 만에 이세돌을 이겼던 알파고 리를 넘어섰고, 72시간 뒤에는 그 버전을 상대로 100전 100승을 기록했다. 프로 기사들에게 이 사건은 이세돌의 패배보다 더 무겁게 와닿았을 수 있다. 인간이 축적해온 기보와 정석이 완벽한 바둑으로 가는 필수 재료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먼저 벗어나야 할 인간적 한계처럼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AI처럼 두기 위해 훈련하기 시작했다
알파고 이전 프로 기사들의 공부는 고수의 기보를 보고, 주변 기사들과 검토하며, 그것을 자기 식으로 소화하는 데 가까웠다. 같은 기보를 보더라도 무엇을 읽어내는지, 어떤 감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지는 기사마다 달랐다. 알파고 이후 그 방식은 빠르게 바뀌었다. 공부의 중심은 AI 추천수와 자기 판단이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확인하고, 그 차이를 줄이는 일로 옮겨갔다. 더 잘 이해하는 것보다, 더 AI처럼 두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프로 기사들은 바둑 AI 분석 프로그램으로 복기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매 수마다 승리 확률을 계산하고 가장 승률이 높은 자리를 파란 점으로 표시하는데, 기사들은 이를 블루 스팟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AI가 왜 그 자리를 가장 좋은 수로 추천하는지, 그 이유까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공부는 자기 해석을 넓히는 일보다, AI가 추천한 수를 이해하고 자신의 판단을 그쪽으로 교정하는 일이 됐다. AI 수법을 거부한 기사들은 빠르게 경쟁에서 밀려났고, 프로로 남으려면 결국 AI의 판단에 최대한 가까워지는 훈련을 해야 했다.
이 변화의 가장 선명한 사례가 신진서 9단이다. 그는 AI 시대의 세계 1위라는 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요 기사들 가운데 AI 추천수와의 일치율이 가장 높았고, AI와 자기 판단의 차이를 줄이는 공부를 누구보다 집요하게 밀어붙인 기사였기 때문이다. 신진서 본인도 이런 공부법이 재미없고 정신적으로 소모된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힘들게 공부했다고 했다. 알파고 이후 최고수의 조건은 자기만의 해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서, AI와의 차이를 끝없이 교정하는 데로 옮겨갔다. 신진서는 그 변화가 만든 새로운 세계 1위였다.
기사, 스승, 해설자의 권위가 함께 흔들렸다
알파고 이후 흔들린 것은 기사 개인의 자존감만이 아니었다. 프로 기사라는 존재가 오래 누려온 권위도 함께 약해졌다. 프로는 더 깊이 읽고 더 정확히 판단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AI가 등장한 뒤 그 정보 우위는 빠르게 사라졌다. 특히 교육 시장에서 그 변화가 먼저 드러났다. 학원, 개인 과외, 지도대국 같은 수입원은 줄어들었고, 프로 기사라는 타이틀만으로 정답을 더 잘 안다고 인정받던 구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승의 권위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선생이 “이건 이렇게 둬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곧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도 AI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가르치는 방식도 단정적으로 정답을 말하는 쪽에서, 자기 생각과 AI의 판단을 함께 비교하고 설명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스승은 판정자라기보다 설명자에 가까워졌다.
해설자의 위치도 달라졌다. AI 형세판단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형세 판단은 더 쉬워졌지만, 해설자의 권위는 오히려 약해졌다. 이제 해설자는 누가 유리한지를 가장 먼저 판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화면에 드러난 AI의 판단을 설명하는 사람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관전 역시 점점 해석과 감상의 영역이라기보다, 실시간 채점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프로의 수는 더 이상 감탄과 해석의 대상만이 아니라, 누구나 즉시 평가할 수 있는 오류의 대상이 됐다.
결국 기사, 스승, 해설자에게 공통으로 일어난 변화는 같았다. 이들은 더 이상 정답을 독점한 사람들이 아니게 됐다. AI 이후 바둑계에서 전문가는 정답의 소유자라기보다, 이미 드러난 정답을 설명하는 사람에 가까워졌다.
바둑계는 어떤 면에서 더 평평해졌다
알파고 이후 바둑계는 더 차갑고 더 단일한 기준 아래 놓이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예전보다 더 평평해진 면도 있었다. 원래 바둑계는 생각보다 훨씬 폐쇄적인 세계였다. 이세돌의 회고처럼, 기보를 보려면 한국기원에 가서 복사해 와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좋은 기보에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는 사람, 더 좋은 스승과 도장 안에 있는 사람이 유리했고, 특히 해외 기사들은 그런 구조에서 더 불리했다.
AI는 그 격차를 일부 무너뜨렸다. 예전에는 고수를 만나도 설명이 애매했고,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AI는 적어도 지금 어떤 수가 더 좋은지, 어떤 방향이 더 유력한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직접적인 기준을 보여줬다. 공부는 더 삭막해졌지만, 동시에 더 짧고 더 명확한 경로를 갖게 됐다. 예전처럼 감각과 인맥, 환경에 크게 기대지 않아도, AI를 통해 빠르게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변화가 가장 흥미롭게 드러난 사례 중 하나가 여성 기사들의 부상이다. 바둑계는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세계였고, 기원과 도장, 사제 관계와 인맥 역시 그 질서 바깥에 있지 않았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AI 도입 이후 여성 기사와 남성 기사 사이의 실력 차이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더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단지 몇몇 개인의 성취라기보다, 예전 바둑계의 격차가 재능만이 아니라 정보 접근성과 학습 환경, 그리고 비공식적인 구조 위에도 서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AI는 바둑계를 더 냉정하게 만들었지만, 적어도 어떤 장벽들은 더 낮게 만들었다.
알파고 이후 바둑계는 더 획일적이고 더 차가운 곳이 됐다. 하지만 동시에, 예전보다 덜 폐쇄적이고 덜 불균등한 곳이 되기도 했다. AI는 바둑의 낭만을 줄였지만, 학습 기회와 정보 접근성의 차이도 함께 줄였다.
바둑계의 지난 10년은 꽤 특수한 사례였다.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이, 정말 하루아침에 기준이 뒤집혔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전까지만 해도 그 변화를 실감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세돌 본인도 승리를 자신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대국 뒤에, 인간이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기준이 바둑계 한가운데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겪기 시작한 변화와 그대로 겹쳐 보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변화 역시 충분히 빠르다. 다만 바둑처럼 규칙과 목표가 분명한 세계가 하나의 압도적 기준 앞에서 하루아침에 재편된 경우와, 현실의 일이 여러 이해관계와 불분명한 기준 속에서 흔들리는 방식은 꽤 다르다.
바둑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바둑은 아니게 됐다. 권위가 무너졌고, 공부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최고수의 의미도 달라졌다. 책에서 다뤄진 그 이후의 변화들이 특히 흥미로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단순히 인간이 졌다는 사실보다, 그 뒤에 어떤 재편이 일어났는지가 더 인상적이었다.